
Share Dialog
지난주 트럼프와 시진핑사이에 또다시 균열이 생긴 건, 중국이 희토류 생산을 줄이겠다고 한 발언 때문이었다. 우리는 희토류의 희소성과 가치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매일 우리에게 한정적으로 생성되는 ‘주의력’이라는 자원의 귀중함은 잊고 지낸다.
우리는 주의력이 고갈되는 문화 속에 파묻혀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자극에 중독돼 늘 뭔가 새로운 즐거움을 갈망하고, 그 자극이 잠깐이라도 사라지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쉽게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면 금세 우리를 ‘방해해주는’ 무언가로 빨려들어가고 싶어한다.
수많은 기업들은, 희토류처럼 한정된 우리의 주의력(공급)을 어떻게든 빼앗으려 한다(수요). 그리고 그걸 최대한 오래 붙잡아 매출로 전환시킨다.
나도 투자자로서 가만히 돌아보면, 그런 회사들—다시 말해 사람들의 소중한 주의력을 얼마나 잘 '빼앗아올 수 있는가'—를 무의식적으로, 때론 의식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매일 명상하고 요가하면서 ‘하루치로 생성되는 내 주의력을 어떻게 하면 더 가치 있는 곳에 두고 낭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무언가에 수동적으로 중독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내 삶의 태도와는 굉장히 모순된다. 마치, 정보 네트워크와 AI 시대의 방향을 논하는 유발 하라리가 정작 핸드폰을 쓰지 않고, 스티브 잡스가 자녀들의 기기 사용을 철저히 통제했다는 이야기처럼.
오늘도, 우리 회사의 한정된 자금 (공급)을 차지하려, 매일 전 세계의 스타트업들이 우리의 문을 두드린다(수요). 그렇다면 나는 이 소중한 자원을 어떻게 쓰는 투자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람들의 주의력을 잘 끌어오는 회사에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주의력을 단순히 빼앗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공하는 무언가가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진짜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하고, 초콜릿처럼 순간적인 쾌감이 아닌 능동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그런 회사를 투자한다면—조금은 내 모순이 풀릴 수 있지 않을까?
한 발자국 물러서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나’라는 사람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것을 공급하고 그들의 소중한 주의력을 할당받는가? 또한 무수히 쏟아져오는 자극들 속에서, 나는 과연 스스로가 선택한 의미 있는 것을 갈망(수요) 하고 있는가?
C+을 받았던 대학 1학년 경제학 수업에서 처음 들었던 개념, ‘공급과 수요’. 그땐 나랑은 먼 세상의 이야기 같았는데, 지금 보니 우리가 매일 하는 수많은 선택 속에 이미 깊숙이 녹아있는 것 같다.
Steve Lee
<100 subscribers
No comments y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