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영화 ‘리빙’을 보았다. 몇십년간 공무원 생활을 한 지긋히 나이 많은 할아버지. 단조로워 보이는 그의 반복되는 삶속에 어느날 6개월만 살수 있다는 암선고를 받으며 사소한 일상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이 귀중한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모두가 싫어하는 그것 ‘덕분에‘ 우리는 삶을 의미를 부여할 조건을 갖추게 된다니,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하지만, 가만히 보면 우리 주변에서 싫고 힘든것이 의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느것을 쉽게 찾아 볼수 있다.
건강을 얻기 위해, 하기 싫은 운동을 하고, 먹고 싶은걸 하나라도 먹으며, 눕고 싶은 소파와 숏폼에서 에서 벗어난다
나만의 가치관을 만들기 위해, 도파민 뿜어나는 사람들속의 쾌락을 포기하고 책을 읽으며, 가만히 있는 고통을 참으며 명상을 통해 내 생각을 가다듬는다
회사의 장기적 가치 창출을 위해, 능력이 없는 친한 동료 해고 하며, 미움을 받을 지언정 옳다고 믿는 말을 한다
어쩌면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욕망과 욕구의 절대 해결될수록 없는 결핍을 인정하고, 더나아가 인생의 디폴트는 어쩌면 불행이라는것을 인정해줌으로서, 의미있는 힘든일들을 해내기 위해 고통을 동반할 용기와 타당성을 응원받으며, 그걸 해내는 속에서 인생의 사소함속에 찾는 큰 의미와 기쁨이 아닐까.

주인공 윌리암 아저씨. 자기의 삶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고통‘을 품은채, 몇십년간 영혼없이 사인하던 그의 ‘재미없는’ 일상속에서 큰 의미와 행복을 찾아 죽기 직전 타던 마지막 그네에서 보여준 미소가 눈에 아른거린다.
영원하지 않음이 주는 아름다움. 고통 또한 행복을 위한 영원하지 않음의 한 모습이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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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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